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이난 전쟁 (문단 편집) == 이야기거리 == * 만화 [[바람의 검심 -메이지 검객 낭만기-]]의 시작 부분이 보신전쟁이 끝난 직후이며 [[카미야 카오루]]의 아버지가 경찰관으로 징집되어 이 전쟁에 종군했다가 전사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는 당시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적절한 설정이다. 실제로 이 당시에는 정부에서 '경시대(警視隊)'[* 징모순사대(徴募巡査隊) 또는 징모경시대(徴募警視隊)라고 부르기도 한다.]라는 경찰 부대를 조직해 세이난 전쟁에서 활용했다. 이렇게 '''"반란 진압을 위해 징집"된 자들이 [[군인]]이 아니라 [[경찰]]이 된 것'''은 당시 메이지 정부가 이제 막 수립, 시행한 국민개병제의 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짓을 했던 탓이다. [[사이토 하지메]] 역시 정부 측에서 이 전쟁에 참가했다. * 메이지 정부는 이전까지의 무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폐지하고 3년간 복무하는 일반 평민으로 구성된 새 군대를 창설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세이난 전쟁 시점에서는 이 플랜이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이제 겨우 2년차에 접어든 참이었기 때문에 병역 경험이 있는 평민이 거의 없었다. 즉 비상시에 소집할 [[예비군]]이 없다는 말이다. 거기다 당시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정규군은 3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반란군은 당시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군대만으로 진압하기에는 너무 강성했고, 추가적인 병력이 필요했다. 동원할 수 있는 예비역도 없었기에 1877년에 동원될 징병 예정인력을 서둘러 징병하기는 했으나,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두려워한 평민층의 기피현상이 심각해서 충분한 숫자의 병력을 뽑는 것이 곤란했다. 여기서 대안으로 대두된 것이 [[무기]]를 다룬 경험도 있고 지금은 실업자로 놀고 있는 수십만의 사무라이들이었으나 여기에는 명분상의 문제가 있었으니, 기껏 군대를 일반 평민으로 조직하려고 새 제도를 만들었고 정착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이제 와서 사무라이들을 다시 군대에 받아들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온 타협점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징집한 사족을 군대가 아닌 경찰로 편성한다'''는 것이었다. --[[의무경찰|전투경찰]]?-- 또한 이제 갓 메이지 유신을 마무리짓는 시점에 내전에 군대를 동원했다가는 말 그대로 내정이 불안하다고 전 세계에 광고하는 꼴밖에 되지 않기에 어찌되었건 군대를 동원할 형편은 아니었다. 이 조치로 인하여 총 1만 여 명의 사족들이 군복이 아닌 경찰복을 입고 반란 진압에 투입되었으며, 이들은 막대한 전공을 세웠으나 메이지 신정부는 사족 군대가 아닌 평민 군대를 키워나간다는 방침을 계속 고수했다. * 경찰복을 입은 구 사족들 일명 '경시대(징모순사대)'가 용감하게 싸운 이유 중 하나는 이들 중 사이고가 이끄는 사쓰마 군대에 패한 아이즈 번이나 [[신선조]] 등 [[막부]]측의 조직에 속해 있던 자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토 하지메]]나 사가와 칸베에가 대표적.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달리 두명 모두 발도대 소속이 아닌, 경시대 소속이었다. 사이토는 별동3여단 붕고구치방면 경시대 2번 소대, 사가와는 동 부대 1번 소대 소속.]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가 쓰러진 후 일자리를 잃은 이들 실직 사족들은 사이고와 사쓰마에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고, 이 반란 진압에서 그 분노를 풀었다. * 사쓰마 군 역시 사쓰마 출신 뿐 아니라 규슈 각지의 사족들, 그리고 요네자와 번(야마가타 현) 출신들도 있었다고 한다. 요네자와의 경우에는 [[보신전쟁]] 당시 사이고가 직접 관대한 처분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 [[톰 크루즈]]가 출연한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정부군과의 전투는 이 전투를 각색하였다. 단 실제와 다르게 영화의 내용은 각색된 부분이 많다. * 세이난 전쟁에서 일본군이 빵을 식사로 활용했다. 막부 말의 에가와 타로자에몬이라는 유럽 군사학을 연구하는 관리가 유럽군대의 식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연구를 시작하였고 1842년에 일본 최초로 유럽 군대식 보존용 빵인 '병량빵'이 만들어진다. 참고로 저런 병량빵을 구운 곳이 그 [[단팥빵]]을 최초로 만든 기무라야였다. 세이난 전쟁이 터지고 나서 메이지 정부의 다급한 요청 아래 정부에 팔아넘겼다고. 그리고 해당 빵은 유럽식 군대 빵을 고대로 재현한거라 딱딱하고 밍숭맹숭한 그야말로 주식으로서의 빵에 충실한 물건이었댄다. 물론 단팥빵 그 자체였다는 얘기도 있다. 자세한 얘기는 [[단팥빵]] 문서 참고. 세이난 전쟁 당시 사족들과 사쓰마 무사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들어간 일본군들은 이런 병량빵과 비스킷, 가다랭이포를 전투식량으로 지급받았는데 빵을 끈에 꿰어 탄띠처럼 허리에 둘러서 다녔다고 한다. 청일전쟁에 이르면 저기서 가다랭이포가 빠지고 고기통조림이 추가된다. * [[스웨덴]] 의 [[헤비메탈]] 밴드 [[Sabaton]] 에서 이 전투를 Shiroyama 라는 곡으로 다루었다. * 일본인 중에는 전쟁의 결과로 [[사무라이]]의 중세적 특권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점을 들어서 세이난 전쟁은 넓은 의미에서 [[메이지 유신]]의 마지막 단계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 구마모토 성의 내부에 있는 박물관에 세이난 전쟁 당시에 쓰였던 무기들을 비롯한 각종 장비들과 문서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 세이난 전쟁의 부상자들을 구호하기 위해 하쿠아이샤(博愛社)라는 구호단체가 생겼다. 오늘날 [[일본]] [[적십자]]의 전신이다. 이 단체에는 [[쇼켄 황후]]가 기부금을 내고, 여러 황족들과 화족들도 많이 참여했다. * 타바루자카 전투 장시 징집된 경찰 발도대를 보고 1885년 [[발도대]]라는 군가가 작곡 되었다. [youtube(Kaz0S6uMdNY)] [각주] [[분류:내전]][[분류:실패한 쿠데타 및 반란]][[분류:메이지 시대]][[분류:1877년/사건사고]][[분류:동아시아의 전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